바다 위에서 살았던 적이 있었다. 11년 전, 나는 해군 2함대에 소속된 을지문덕함에서 먹고 자고 일하며 돈을 벌었다. 나라가 제공해 주는 숙식이 포함된 최고의 일자리. 군대. 초임 부사관이었던 나는 함정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부식된 페인트를 벗기고, 다시 페인트칠 하는 일을 주로 했다. 페인트칠을 하지 않을 때는 여기저기 불려 다니며 욕을 먹거나, 커피를 탔다. 선임들의 커피 취향을 외워 그들의 입맛에 맞는 커피를 타는 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나 마찬가지일 거라고 믿으면서.
그날도 역시 출근하자마자 맥심 커피를 손에 가득 쥐고 뜨거운 물을 받으러 가고 있었다. 3주간 먼바다로 출동을 나가는 날이라 분주한 아침이었다. 출항하는 날은 원래도 준비할 게 많은데, 출항 후 미군 함정과 연합하여 하는 훈련이 계획되어 있어서 평소보다 훨씬 바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선임들은 커피를 한잔 마시고 일을 시작해야 한다. 씨팔 그놈의 커피… 나는 ‘갑판’이라는 직별의 부사관이었고, 우리 배의 갑판 부사관은 여섯 명이었다. 막내인 나는 매일 아침 여섯 잔의 커피만 탔으면 됐는데, 그날은 달랐다. 갑판장님께서 중요한 훈련을 앞두고 있으니, 갑판병들을 격려해야겠다며 그들의 커피까지 타오라고 지시한 것이다. 갑편병은 스물두 명이었다. 아무래도 군대에서는 나이를 먹고 높은 사람이 될수록 판단력이 심하게 떨어지는 것 같다. 진심인가? 싶어 망설이는데 갑판장님이 장난스럽게 내 궁댕이를 걷어차며 빨리 출발하라고 말했다. 미묘하게 굳은 내 표정을 본 상병 하나가 같이 가서 돕겠다고 나섰다. 눈치 없는 갑판장님은 역시 연지가 애들을 잘 잡아놨다며 박수를 쳤다. 나는 사람 좋은 척 웃었고, 속으로는 저주를 퍼부었다. 스물여덟 잔의 커피를 타러 가는 길, 상병은 자기가 죄송하다고 말했다. 나는 서러움에 밀려오는 눈물을 참느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병사 앞에서 우는 건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커피를 타서 돌아오니 선임 부사관 두 명이 보이지 않았다. 아침부터 감기기운이 있던 선임은 독감 판정을 받았고, 또 한 명은 출근하면서 다리를 삐었는데 생각보다 심하게 부어 출항 전 급하게 배에서 내렸다는 것이다. 그날 훈련은 갑판사들이 주도적으로 집행하는 훈련이었다. 두 선임 모두 중요한 역할을 맡고 있었다. 갑판장님은 이마를 찡그리며 한숨을 쉬었다. 한참을 고민하던 갑판장님은 그들의 자리에 나와 한 병사를 지목했다. 선임들의 조수 역할밖에는 한 적이 없던 나는 제대로 해낼 수 있을지 걱정됐지만, 그래도 온전한 내 역할이 주어졌다는 사실에 내심 기뻤다. 실수하지 않으려 머릿속으로 절차를 되새겼다.
우리가 해야 할 건 ‘해상유류수급 훈련’이었다. 쉽게 말하면, 바다 위에서 주유하는 일이다. 기름이 부족해진 함정이 다른 군수지원함으로부터 연료를 받는 과정인데, 두 함정이 서로 몇십 미터 거리에서 나란히 항해하며 연결 케이블과 유류 호스를 주고받는다. 바다 위에서 건물 크기의 두 쇳덩이가 나란히 달리는 장면을 상상해보라. 한 번의 실수가 곧 사고로 이어지는 고난도 훈련이다. 나의 임무는 군수지원함에서 넘어온 유류 호스를 우리 배 주유구에 꽂는 것이었다. 이 말만 들으면 단순하지만, 그 호스는 내 허벅지만큼 굵고 사람 열댓 명이 달라붙어야 간신히 당길 수 있을 만큼 무겁다. 흔들리는 바다 위에서 그걸 잡고, 연결하고, 고정해야 했다.
삑! 갑판장님의 호루라기 소리에 맞춰, 갑판 위의 모든 인원이 동시에 움직였다. “잡아!” 명령과 함께 모두가 호스를 잡아당겼다. 파도에 맞춰 함정이 요동쳤고, 사람들은 호스를 놓치지 않으려 이를 악물었다. 나는 제자리에 고정된 걸쇠를 잡고, 호스의 머리를 주유구 방향으로 돌렸다. 그때, 바람이 불며 갑자기 배가 기울었다. 순간 중심을 잃었고, 손에서 호스 머리가 미끄러졌다. 잡고 있던 쇳덩이가 쿵! 소리를 내며 갑판을 내리찍었다. 호스가 파도에 휘말리며 이리저리 흔들렸다. “뭐 해! 잡아! 잡으라고!” 갑판장님의 고함이 들렸지만, 나는 얼어붙은 채 손만 허우적거렸다. 겨우 정신을 붙잡고 다시 호스를 붙잡았지만, 이미 각이 틀어져 있었다. 유류 호스 끝이 주유구에 닿기도 전에, 다른 쪽에서 “정지!” 명령이 떨어졌다. 훈련이 중단됐다. 모든 시선이 내 쪽으로 쏠렸다. 나는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파도 소리만 귓가에 남았다. 다행히 인명사고도 없었고, 기름 한 방울 새지 않았지만, 그 순간에는 배 전체가 멈춘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훈련이 끝나자 갑판장님은 나를 불렀다. 그는 안전모를 쓴 내 머리를 쎄게 두 대 내리쳤다. “씨발 너 남군이었으면 뒤지게 맞는건데 여자라 이 정도로 넘어가는 줄 알아” 내가 잘못한 거니까 맞은 건 억울하지 않았지만, 여자라 이정도로 넘어간다는 말이 자존심 상했다. 차라리 먼지 나게 두들겨 맞는 편이 나을 것 같았다. 갑판장님이 씩씩거리며 올라가고, 나는 혼자 남아 터져 나오는 울음을 참았다. 어두운 밤의 바다는 까맣고, 조용하고, 짰다. 그 고요함을 보고 있으니, 최고의 갑판사가 되겠다고 다짐하던 임관식 날이 떠올랐다. 최고는 개뿔. 갑판사는 개뿔. 훈련 하나 제대로 못하고 커피나 타는 게 무슨 군인이라는 건지. 손끝이 아릴 만큼 차가운 바닷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그제서야 왜 선임들이 밤에 갑판 위에 혼자 나가지 말라고 했는지 알았다. 그대로 뛰어내리고 싶었다. 진심으로 그랬다. 하지만 이대로 죽으면 너무 쪽팔릴 것 같았다. 죽더라도 해상유류수급 훈련만큼은 완벽하게 숙지하고 죽어야지. 죽고 싶은 마음은 잠시 접어두고, 침실로 올라가 오늘의 실수를 되새겼다. 눈물을 세 번 정도 참으며 나라를 지키던 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