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lolog

도무지 쓸 이야기가 생각이 나질 않는다. 찬물을 뒤집어쓰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생길까 싶어 보일러도 켜지 않고 옷을 주섬주섬 벗었다. 홀딱 벗은 몸으로 샤워기 앞에 서서 물을 맞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은 무슨 글을 쓰지 하는 생각으로만 가득 차 있었다.

지난주부터 수필 합평 모임에 참여 중이다. 합평을 하기 위해서는 매주 한 편의 글을 써야 하는데, 첫 주부터 숙제를 제때 내지 못해 이렇게 똥줄이 타고 있다. 2,000자 쯤이야 금방 쓰지 않을까 해서 여유를 부렸다. 젠장. 무슨 건방이었지? 지난날의 나를 데려다가 머리를 한 대 쥐어박고 싶은 심정이다. 샤워타올에 바디워시를 북북 짜며 모임의 진행자인 소신이 쓰고 싶은 이야기가 없다면 참고하라고 제안해 준 주제를 떠올렸다.

오래된 습관. 오오래된 스읍관. 오오오..래애애..되에에에에엔..

몇 번을 읊조려 봐도 오래된 습관은 떠오르지 않고, 왱왱 환풍기 돌아가는 소리만 귀에 맴돌았다.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보니 환풍기에 축축한 먼지가 한가득 앉아 있었다. 저걸 왜 이제 봤지. 손에 닿는 거리였다면 숙제고 샤워고 뭐고 뒤로 다 미루고 저걸 닦겠다고 한참을 낑낑댔을 것이다. 다행히 천장은 너무 높았다.

구석구석 몸을 씻으며 오래된 습관에 대해 생각했다. 내가 무슨 습관이 있더라. 남들이 다 읽을 글을 쓰는데 평범한 건 쓰고 싶지 않아 특별하고 이상한 습관을 떠올리려 애썼지만, 불안하면 손톱을 물어뜯는 것 밖에는 생각이 나질 않았다. 지금도 내 엄지손톱은 핑킹가위로 자른 것마냥 울퉁불퉁하다. 하. 아무리 그래도 손톱 물어뜯는 걸로 이천 자를 채우는 건 멋대가리가 없다. 마음이 급해진 나는 몸에 묻은 비누 거품을 헹궈내면서도 손톱을 입에 넣었다. 바디워시 맛이 났다. 향기로웠지만 맛은 없었다. 이대로라면 멋도, 맛도 없는 글을 쓸 게 분명했다. 마음속에서 모임 신청을 하지 말 걸 하는 후회가 솟구쳤다. 원래의 나라면 이쯤 되면 아몰랑! 하며 다 때려치웠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엔 상황이 좀 다르다. 이 모임의 상당수가 내가 운영하는 가게의 단골이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행자 소신까지도. 아는 사람에게 내 밑천을 드러내는 건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내가 숙제를 제출하지 않는다면 소신이 가게로 찾아와 생글생글 웃으며 연지~ 글 다 안 써언? 무슨 일 인~? 하며 물어볼거다. 그렇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할까.

아그거숙제내가글을쓰려고했는데있잖아아니쓰려고한건아니고당연히쓸수있을줄알았는데쓰려고하다보니까손톱얘기밖에생각이안나는거야근데손톱얘기는쫌그렇잖아그래서그냥안썼어아니다안쓴건아니고못쓴거야엉엉

따위의 변명을 횡설수설 늘어놓을 것이다. 말도 안 되는 변명에 실망한 소신은 그랜~? 어쩔 수 언~ 하며 전에 볼 수 없던 축 처진 모습으로 집에 돌아가겠지. 그 모습을 본 연지는 미안함과 쪽팔림에 죽어버리고 말았답니다. 대충격결말. 하하. 이렇게 죽을 순 없다. 뭐라도 써서 내야 한다.

다시 앉아서 글을 쓰기로 결심한 나는 후다닥 샤워를 마치고 몸을 닦았다. 하지만 물기를 닦아내면서도 내 시선은 자꾸만 먼지 낀 환풍기로 향했다. 왜 하필 지금 환풍기에 꽂혀버린 걸까. 이해할 수가 없다. 평소의 나는 그렇게 깔끔떠는 성격도 아니다. 결국 나는 옷을 입다 말고 거실로 나가 의자를 질질 끌고와 환풍기의 먼지를 닦아냈다. 반쯤 벗은 우스운 꼴이었다. 먼지가 몸으로 떨어져 다시 샤워를 해야했다. 찬물을 그렇게나 맞고도 기발한 이야깃거리는 생각나지 않았다.